Chocolate Covered Strawberries


보이는 것보다 먼

시오야 이쿠히로는 땀에 젖어 깨어났다. 세이후의 에어컨은 도내 제일이라더니. 사기다. 그는 매듭이 풀어진 두건을 벗어 내렸다. 두건은 그대로 이마를 닦는 데 쓰였다. 텅 빈 교실은 그야말로 불타는 듯이 붉었다. 이쿠히로는 창밖의노을을 바라보았다. 한여름, 해가 천천히 떨어지는 계절. 귀가가 꽤 늦어진 건분명했다. 그는 목을 문지르며 불평했다. “아무도 안 깨웠다고? 실화냐…….”
 교실에 혼자 푸지게 엎어져 있던 건 자신이고, 대청소가 끝난 후 남은 뒷정리마저 자진해서 한 일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없다. 아무렇게나 쏟아낼 곳이 필요한 나이란 것도 이쿠히로에겐 먼일이다. 그래서 복잡한 고등학생은 종종 외국인만큼 낯설게 느껴졌고, 이쿠히로는 그들만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게 늘 잘 되진 않았긴 해도.
 이쿠히로는 의자에서 엉거주춤 몸을 빼냈다. 방학을 앞두고 왁스 칠까지 해둔바닥을 긁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 대신 시선이 거침없이 미끄러진다. 칠판 앞까지 훑은 이쿠히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교실은 그야말로 빛이났다. 그렇게 힘껏 쓸고 닦고 하지 않아도 이 학교는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무엇이든 보탤 수 있었다면 좋았다.
 어차피 마음을 쏟을 만한 다른 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 부족함 없는 평형을 기울여 버리는 건 언제나 이쿠히로의 밖에서 닥쳐왔다. “뭘까. 그 표정.” 이쿠히로는 덜컹대며 의자 등걸을 밀었다. 바닥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아, 깜짝이야…….” “왜 그렇게 놀라. 수상하게.” “내 표정이 왜?” “음흉하게 웃었잖아.” 바닥을 살펴볼 틈은 쟈카사키 레이나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쿠히로는 반박하지도 못한 채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 “히죽댔으면서.”물론 그렇게 말하면서 히죽거리는 건 레이나였다. “그런 적 없다.” “그랬거든.” “그럼 뭔데.” “뭐가.” 이쿠히로는 쥐고 있던 두건을 괜히 펼쳤다가 접기 시작했다. 옅은 땀 냄새가 나자 그는 그대로 두건을 구기듯 움켜쥐었다. 그리고 열린가방 안쪽으로 슬쩍 떠밀었다.
 “음흉한 일 아니면 왜 남았어?” “청소.” 정말 그게 다였다. 하지만 이쿠히로의꾸밈없는 어조에도 레이나는 선뜻 그를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뭐랄까, 그거밖에없을 줄은 알았지만.” “알았지만?” “그게 다라니 맥이 빠지네.” “그러냐.” “한심할 정도잖아.” “그럼 넌 한심한 거 구경 왔냐.” 이쿠히로는 몸을 숙여 가방을 닫았다. 얼굴을 내민 각도에서 벌겋게 쏟아지는 빛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을 때 이쿠히로는 뜻밖의 광경과 마주쳤다. 말문이 막힌 표정을 한 레이나가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자신을 놀리듯, 그대로 발을 빼버릴 것처럼 교실 문턱에 올라서 있었지만. 레이나가 그처럼 선명하고 가깝게 느껴진적이 전에는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레이나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구경은 다했고.” “아직.” “여기서 뭘 더 해줘.” 그러자 레이나가 소리 내서 웃었다. 그건 예전처럼 날카롭게 들리지 않았고, 웃음이라기보단 더위에 지쳐 헉헉대는 숨소리에 가까웠다.숨이 차도록 달려온 것도 아닐 테고, 땀에 젖지 않은 머리카락은 여전히 가벼워보이기만 하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이쿠히로가 괜히 앞머리를 털었다.
 그건 땀에 젖어 여전히 무거웠다. 그런 모습을 다 간파하기라도 한 듯 레이나가 말했다. “됐거든. 더 한심해질 일도 없어.” “난 지금이 바닥이다?” “그렇게 되나?” “부정하는 척이라도 해라.” 이쿠히로는 매끄러운 바닥을 내려다봤다. 다행스럽게도, 그곳까지 떨어진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일은 없다. 그 대신 의자가 끌리며 남긴 검고 짧은 선이 있었다. 이쿠히로가 탄식했다. 그게 자신 때문인 줄알았는지 레이나가 또 웃었다. “네가 먼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문턱을 넘어왔다. 가방을 메던 이쿠히로가 멈칫했다. “너 신발…….” “내 신발?” 레이나는 밑을 보지도 않았다. 자신이야말로 그곳에 얼굴이 비치는 걸 겁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쿵쿵쿵 가까워지는 그를 이쿠히로는 막을 수도 없다. “바닥 조심하라고.” 그가 겨우 말했다. “좀 미끄럽긴 한데.” “…….” “아, 설마.”
 어떤 가능성에 도달한 레이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바닥 걱정이지?” 묻는 것과 동시에 레이나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렇게 힘을 쓰면 생각보다 귀여운소리도 안 난다. 이쿠히로는 맞은 팔뚝을 문질렀다. “장난해? 이거 신고 내 방에들어갈 수도 있거든?” 물론 과장이겠지만, 이쿠히로는 레이나가 그러지 못할 거란 생각도 안 했다. “그러니까 방에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하냐고.” “가든 말든.무슨 상관?” 톡 쏘듯 돌아온 대답에 이번엔 이쿠히로가 눈을 좁혔다. 그는 여전히 레이나의 언어를 알 수 없다. 그가 받아들이도록 말하는 법도 알지 못한다.그래도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집에 가기 싫은가보다.” 레이나가 코웃음을 쳤다. 이번엔 날카롭게 느껴졌다. “두고 온 게 있어서 돌아온 것뿐이야.” “뭔데. 같이 찾아줘?” 레이나가 싫어할지라도 그렇게 말해버리는 걸 이쿠히로는 멈출 수없다. “웬 착한 척. 됐네요, 이미 찾았어.”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되더라도. 보답받지 못하고, 답답해 보이고, 소용 없는 일이 되더라도. “그럼 가자.” 꾸준히 다음을 향해 전진하는 게 이쿠히로였다. 그걸 내다 버리는 건 레이나에게도 어렵다. “내가 할 말이었다고.” 그 역시 원하는 대로 하고 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쿠히로가 레이나를 위할 때, 레이나 역시 자신을 위해 놓지 않는 일이 있다.이쿠히로만큼이나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는 것. 가끔은 넘어지거나 뒤처질지도모르지만……그게 오늘은 아니다.

 “바쁘냐?” 이쿠히로가 어이없단 듯이 물었다. 레이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와 교정을 나선 그들은 이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 길은 사람과 차가 구분 없이 다니고, 헛디딘 순간 푹 빠져버리고 마는 흙밭이 사방에 도사린다. 그곳을 바라볼 마음이 들지도 않는 건 이쿠히로가 길 한 가운데 서 있기 때문일 거다. “별로?” “화장실 급하면 다시,” “또 맞고 싶나 본데.” 이쿠히로는 군말 없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진짜 맞고 싶은 거?” “갈 길 바쁘시다는데 맞춰 드려야지.” 이번에 레이나는 주먹을 들지 않았다. 그 말대로 여길 빨리 떠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역시 지친다. 더워.” 이쿠히로가 중얼거렸다.
 질질 늘어진 해는 여전히 땅을 바싹 익히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그늘조차되어주지 못하는 게 바로 자신. 이쿠히로를 더 볼 수 없었던 레이나는 고개를 휙돌려버렸다가, “……저쪽.” 그들에게 알맞은 쉼터를 찾았다. 믿을 수 없는 배차간격 탓에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버스 정류장,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자판기가다인 쉼터이긴 했어도 이쿠히로는 만족했다. 그리고 레이나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처럼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걸. 이쿠히로가 무어라 말해댔지만, 레이나는 따자마자 부글대는 소다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뒤늦게 이쿠히로를바라보았을 때, 그는 벤치에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바닥에 떨어트린 채였다. 이제 이쿠히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도 지쳤어? 그렇게 물을 여유도 레이나에겐 이젠 없다. “히로.” 그 목소리보다 매미 우는 소리가 더 컸다. “나,먼저 갈게.” 레이나는 뒷걸음질로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아주오랫동안 시오야 이쿠히로를 지켜볼 수 있었다